용산횡설수설➍

동빙고와 서빙고, 나라의 얼음 창고

6월인데 벌써 덥다. 전에는 30℃가 여름 더위를 상징했다. 하지만 요즘은 여름 초입부터 30℃가 넘는다.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바뀌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올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이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옛날 사람들의 여름 나기는 어땠을지 궁금증이 미쳤다. 냉장고, 선풍기, 에어컨도 없는 옛날에는 더위를 어떻게 식혔을까?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한강 채빙 사진(1929) © <경강: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서울역사박물관, 2018), 135쪽
우리나라 날씨는 4계절이 분명하다. 좋게 생각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제각각 다 특색이 있지만, 먹고 살기 힘들었던 옛날 사람들에게 계절의 변화는 곧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위협이었다. 겨울의 엄동설한을 견뎌내면 얼마 뒤 삼복더위가 찾아오고, 더위와 싸워 이기면 다시 엄동설한이 오는 식이었다. 혹심한 추위와 더위 중에 더 무서운 것은 추위였다. 더위로 죽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얼어 죽는 사람은 늘 있었다.
그래도 추위는 무언가를 태워서 온도를 높이면 면할 수 있지만, 더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연적으로 온도를 낮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 시원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채 부치고, 개천에서 미역 감고, 바람 잘 통하는 계곡 같은 데를 찾아가는 정도가 옛날의 피서법이 아니었을까? 그런 중에도 더위를 식혀 주는 반가운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얼음이었다.
용산의 동빙고와 서빙고
지금이야 얼음을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지만, 1880년에 제빙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얼음을 만들지 못했다. 대신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서 여름까지 보관했다가 사용했다. 이렇게 얼음을 보관하는 일을 장빙(藏氷)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장빙의 역사를 대표하는 곳이 바로 용산의 동빙고와 서빙고였다.
우리나라에서 장빙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505년, 신라 지증왕 6년에 담당 관청에 명해서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빙고전(氷庫典)이란 관청이 있었는데, 여기가 그 담당 관청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인 <신당서>에는 신라에서 여름에 음식을 얼음 위에 둔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용도를 알 수 있다. 또 고대 중국에서 제사에 사용하는 술을 차갑게 하거나 장례를 치르는 데 얼음을 썼으므로 우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려에서도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했다. 24절기 가운데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부터 여름이 끝나는 입추까지, 그러니까 5월부터 8월까지 고위 관료들에게 7일마다 얼음을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국왕과 왕족도 당연히 얼음을 지급받았다. 이들은 모두 개경에 살았으므로 개경 가까이 있는 예성강의 얼음을 썼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한강 변에 동빙고와 서빙고를 설치하고 얼음을 보관했다. 동빙고의 얼음은 국가 제사용으로 사용했고, 서빙고에는 정2품 이상의 고위 관리들에게 지급할 얼음을 저장했다. 서빙고의 얼음은 그 말고도 노인들의 더위를 식혀주고 병자들의 열을 내리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궁궐 안에는 왕실 전용의 얼음을 저장했다 쓰는 내빙고(內氷庫) 2개를 따로 두었다.
동빙고는 처음에는 두모포,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다. 그러다 1504년에 연산군이 두모포 일대를 사냥터로 만들면서 지금의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이전되었다. 서빙고는 처음부터 용산구 서빙고동 둔지산 기슭의 지금 자리에 있었다. (현재 경의중앙선 서빙고역 1번 출구 서빙고 파출소 왼쪽에 ‘서빙고터’ 표석이 있다.) 동빙고가 옮겨 오면서 조선시대의 빙고 둘이 모두 용산구 지역에 있게 된 셈이었다.
동, 서빙고와 2개의 내빙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서빙고였다. 조선 후기인 1680년(숙종 6) 기록을 따르면 서빙고의 얼음이 전체의 70%를 차지했다.
서빙고 터 표석
어떻게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했을까?
빙고 건물은 산기슭에 땅을 깊이 파서 얼음 저장실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덮었다. 밖에서 보면 지상의 지붕만 보였을 것이다. 저장실에 얼음덩이를 차곡차곡 쌓았는데, 얼음덩이 사이사이의 조그만 틈을 얼음 조각으로 메워서 빙고 안 전체가 커다란 얼음덩이가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거적을 여러 장 덮어 외부 공기와 차단했다. 이렇게 하면 여름까지 3분의 2 정도는 녹고 나머지 3분의 1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 조선시대에 얼음은 얼마나 많이 저장했으며, 얼음을 채취하고 운반하는 일은 누가 했을까? 이제부터는 KAIST 고동환 교수의 연구를 중심으로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먼저, 얼음 채취는 음력 12월과 1월 중에 날을 잡아 오전 2시 경, 지금은 사라진 한강변의 저자도 근처에서 했다. 한강에서 떼어내는 얼음의 크기는 길이 45cm, 너비 30cm, 두께 21cm였고, 그 무게는 18.75kg(5관)이 되었다. 이런 얼음 세 덩이를 한 데 묶어서 지게 한 짐으로 운반했다. 5관 무게의 얼음 한 덩이를 1정(丁)이라고 해서 얼음을 세는 단위로 삼았는데, 조선후기에 4개 빙고에 저장한 얼음이 대략 20만 정 정도였으니 무려 3,750톤이나 된다. 그러나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이것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4개 빙고에 국한된 것이고, 그밖에 민간에서 운영하는 사빙고(私氷庫)가 더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개인 빙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왕이 허락을 받아 망원, 합정 지역에 빙고를 만들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빙고가 늘어났다. 그러다 조선후기에 상업이 발달하고 민간 장빙업자들이 출현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이들이 장빙업에 투자해서 1년 동안 저장한 얼음이 3백만에서 5백만 정으로 추산된다. 5만 6천~9만 3천 톤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4개 국영 빙고와 민간의 빙고를 합치면 6만에서 10만 톤 가량의 얼음을 저장한 셈이다. 당시 서울의 실거주 인구가 30만 명이었으므로 1인당 얼음 저장량은 200~300kg이 되고, 그 가운데 3분의 2는 녹아 없어지고 3분의 1만 사용한다 했으니 1인당 얼음 소비량이 70~100kg이나 된다. 같은 시기 다른 어느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얼음을 소비할 수 있었을까? 얼음에 관한 한 조선은 선진국이었다.
추위에 땀 흘리며 일한 사람들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고 빙고로 운반하는 일을 누가 했을까? 일년 중 가장 추운 날, 추운 시간에 강바람을 맞으며 얼음덩이를 떼어내고, 그것을 지게에 지고 빙고까지 나르는 일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추운 겨울에 차가운 얼음을 깨고 지고 하면서 땀을 흘렸을 것이다. 이 일은 한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부역 노동으로 해결했다. 이런 부역을 장빙역(藏氷役)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백성들의 부역 의무가 쌀이나 돈으로 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장빙역 역시 폐지되고 이후로는 사람을 사서 돈을 주고 일을 시키게 되었다. 이제 얼음 채취와 저장이 힘겨운 부역에서 겨울철의 돈벌이로 바뀌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빙업의 최종 승자는 민간업자들이었다. 얼음 판매가 큰 돈벌이가 되면서 점차 민간업자들이 투자하기 시작했고, 국가에서도 빙고를 운영하기보다 이들에게서 얼음을 구입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빙고 역시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얼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으셨는지 모르겠다. 옛날 조상들은 겨울에 흔한 얼음을 여름까지 저장해서 더위를 식혔다. 이 방법은 인력 외에 어떤 에너지도 들지 않고 자연을 훼손하지도 않았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친환경적인 피서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 살기 좋았던 사계절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록 지구는 그만큼 뜨거워지는 것이 이치이니, 그러려면 여름을 지금보다 조금은 덜 시원하게 보낼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