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횡설수설➏

용산에 보물창고가 있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 그 무더운 여름도 시간 앞에선 어쩔 수 없나 보다. 가을이 다가오니 밖으로 나가 보물을 찾아보자. 우리나라에서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일까? 단연 서울의 용산이다. 용산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보물이 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국립중앙박물관 전경
박물관이 용산에 오기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자리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도 채 되지 않은 2005년 10월의 일이었다. 그 전에는 경복궁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 내력이 간단치 않다.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은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에 처음 개관했다.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한 것이다. 그때부터 박물관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6.25 전쟁 때는 박물관 유물들이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휴전 후 서울로 돌아오는 수난을 겪었다. 그런데 경복궁이 아니라 덕수궁 석조전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16년을 있다가 1972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지금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을 새로 짓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1986년 중앙청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본래 조선총독부 청사였고, 해방 후 중앙청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부청사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청사가 광화문과 과천에 새로 만들어지면서 중앙청 건물이 비게 되자 활용 방안을 논의한 끝에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박물관의 의지와 무관한 빈자리 차지하기였다.
1995년에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다. 총독부 건물은 곧 국립박물관이었다. 건물이 철거되면서 박물관의 유물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사회교육관 건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1996년 12월에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하지만 박물관의 용산 이전 계획이 이미 수립되어 있었던 만큼 이번의 이전은 있을 곳이 없어진 유물들이 잠시 머물기 위한 것이었고, 9년 만인 2005년에 용산 새 박물관으로 이전해서 오늘에 이른다.
박물관의 유물들이 해방 후 몇 번이나 이사를 다녔을까? 세계 어느 문명국의 유물들이 우리처럼 자주 이사를 다녔을까? 최소 수백 년 이상 된 유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는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자리에 오래도록 있게 하고, 옮기지 않아야 한다. 전쟁으로, 건물 철거로 이미 그 예의를 어겼으나, 이제부터라도 용산에서 천년만년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물관 앞뜰의 보물들
이제 박물관으로 가보자. 다른 세계적인 박물관과 비교할 때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은 규모나 건축의 장엄함에서 손색이 없다. 정면의 연못 앞에서 남산 쪽을 바라보는 풍경은 계절과 날씨에 관계없이 언제나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 박물관은 접근하기가 어렵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바로 길가에 있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지하철과 바로 연결된다. 우리 박물관은 전철역에서 정문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하고, 정문에서 또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입구가 나온다. 귀한 보물을 마주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일까?
하지만 박물관이 길에서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넓은 앞뜰을 품게 되었고, 그곳에는 자연스럽게 야외 전시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박물관의 동쪽, 한글박물관에서 박물관 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끄트머리에서 시야가 넓게 트이면서 배롱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석탑이 눈에 들어오고 그 주변에 석탑과 석등, 부도들이 늘어서 있다. 이번에 눈여겨볼 유물은 그 오른쪽에 있는 석등이다.
석등 앞 돌판에는 이름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이고 고려 10세기에 만들어졌으며, 보물 제282호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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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 쌍사자 석등
두 마리 사자가 불발기집(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다른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석등은 고달사가 우리나라 3대 선원의 하나인 고달원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유물, 알면 더 많이 보인다
쉽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불발기집(화사석)이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유물을 직접 보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두 마리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서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는 것이 특이한 것일까? 그렇다면 다른 석등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이걸 알아야 이 설명이 온전히 이해가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 석등들은 모두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앞, 뒷다리를 길게 뻗어 불발기집을 받치고 서 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이 모두 그렇다. 그래서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이 이채롭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쌍사자 석등에 대해서 알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을 더 잘 알 수 있다. 알면 더 많이 보이는 것이니,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욱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이 쌓여가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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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_법주사 쌍사자 석등,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고달사의 이산가족
이 석등이 원래 있던 고달원은 경기도 여주에 있던 절로, 뒤에 고달사로 불렸고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지금도 절터에는 부도 2기와 비석의 귀부, 이수 등이 남아 있는데, 그 크기와 웅장함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고달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이고, 특이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어야 할 쌍사자 석등이 왜 용산에 와 있는 걸까?
쌍사자 석등뿐 아니라 고달사의 비석도 용산 박물관에 있다. 본래 이 절은 고려 초의 고승 원종대사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대사가 입적한 뒤 광종의 명으로 부도와 비석을 세웠다. 부도는 고달사에 있지만, 비석은 받침대(귀부)와 지붕(이수)만 고달사에 있고 비신은 1916년에 무너져 여덟 조각으로 쪼개지는 바람에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쌍사자 석등도 고달사 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59년에 경복궁으로 옮겼고, 박물관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고달사의 유물들은 이산가족이다. 사람이든 유물이든 가족의 헤어짐은 슬픈 일이다. 또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 제 가치를 갖는 법이다. 이 둘을 합치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야외 전시장의 다른 유물들도 모두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연일까? 이런 생각과 함께 유물들에게 잠시라도 눈길을 주기를 권한다. 오래된 유물에 대한 두 번째 예의는 예술품으로 대접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