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횡설수설 ➑

조선 후기 용산 전성시대

용산구의 인구는 얼마나 될까? 2020년 12월 31일 기준으로 23만 40명이다. 서울 전체 인구의 약 2.4%이고,
서울의 25개 구 가운데 아래서 세 번째로, 중구와 종로구만이 용산구보다 인구가 적다. 하지만 한때는 용산 인구가 서울에서 가장 많았던 적이 있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조선 후기 <도성대지도>에 보이는 용산방, 둔지방, 한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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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2년 뒤인 1394년 10월 25일 역사적인 한양 천도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모두 양주로 쫓아내고 왕족과 관리, 그리고 개경 사람들이 이주해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름도 고려 말에 한양부라고 하던 것을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한성부 아래에는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등 5부를 두고, 5부 아래에는 방을 두었는데 모두 52개였다. 이렇게 해서 5부 52방의 행정구역이 완성되었다.
경기도 고양의 용산
하지만 용산은 5부에 들지 못했다. 조선의 한성부는 기본적으로 도성으로 둘러싸인 4대문 안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숭례문 바깥에 있던 용산은 고려시대에 용산처(龍山處)로 있다가 고려 후기인 1284년에 부원현(富原縣)이 되었고, 조선 건국 직후인 1394년에 행주, 황조향과 함께 고봉현(高峯縣)으로 합쳐졌다. 그리고 1413년에 다시 고봉현과 덕양현이 통합되어 고양현(高陽縣)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용산 횡설수설 5> ‘용산, 고려의 서울이 될 뻔하다’ 편에 나온다.) 즉 용산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으로는 한성부가 아니라 경기도 고양에 속했다.
한성부 성저십리와 용산
그런데 용산이 경기도에만 속한 것이 아니었다. 한성부에서는 도성으로부터 10리 안 지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로 묶어서 관리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까지였다. 용산은 당연히 성저십리에 들었고, 한성부와 경기도 양쪽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 말은 용산에 사는 사람들이 한성부와 경기도에 이중으로 국역을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들은 국가에 세 가지 의무를 졌다. 첫째는 전세(田稅).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의 일정 비율을 국가에 내는 것이다. 둘째는 공납(貢納). 국가에서 정해준 특산물을 현물로 내는 것이다. 셋째는 역역(力役).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군대에 가는 군역(軍役)과 성이나 제방 쌓기, 길 내기 같은 공사에 동원돼서 일하는 요역(徭役)으로 나뉘었다. 하나같이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도성 사람들은 전세와 공납, 군역을 면제받았다. 그 대신 방역(坊役)이라고 해서 도성의 유지, 관리를 위한 공사에서 일하고 전세 대신 집과 대지에 대한 세금을 내면 되었다. 서울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에서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성저십리 사람들은 어땠을까?
성저십리 사람들은 경기도민으로서 전세, 공납, 역역을 지는 외에도 도성 사람들과 같이 방역을 져야만 했다. 누가 봐도 부당한 대우였다. 성저십리 주민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고, 결국 1461년(세조 7년)에 성저십리를 경기도에서 떼어내 한성부의 중부를 뺀 나머지 4부에 소속시켰다. 이때 용산은 한성부 서부에 속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성저십리 주민들을 각종 잡역에 동원하는 일이 계속되다가 성종 때 『경국대전』에 가서야 도성 사람들과 같게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비로소 서울 사람이 된 것이다.
용산의 인구 증가
성저십리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가능했던 것은 인구가 적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종 때인 1428년(세종 10년)에 한성부 5부의 호수는 1만 7,015호, 인구는 10만 3,328명이었는데, 성저십리는 1,601호, 6,044명으로 호수는 9.4%, 인구는 5.8%에 불과했다. 그러니 성저십리 사람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조정에 전달되기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흘러 조선 후기에는 성저십리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용산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17세기 후반부터 서울의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강을 이용한 상업이 발달하면서 한강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이어졌다. 영조 때인 18세기 후반에는 조선 초의 5부 52방이 5부 43방으로 개편되었다. 도성 안의 작은 방 14개가 통폐합되어 없어지고 대신 남부에 두모방(豆毛坊), 한강방(漢江坊), 둔지방(屯之坊)과 서부에 용산방(龍山坊), 서강방(西江坊) 등 5개 방이 새로 생긴 결과였다. 신설된 5개 방은 모두 한강변에 있었다. 용산이 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 용산처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뒤로도 한성부 인구는 계속 증가했고 방도 신설되어 북부에 상평방(常平坊), 연희방(延禧坊), 연은방(延恩坊)과 동부에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추가된 결과 47방이 되었다. 이때는 청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서울과 의주를 잇는 도로변에 인구가 증가한 결과 4개 방이 신설된 것이었다. 이 47개 방 가운데 용산방의 인구가 가장 많았다. 1789년(정조 13년) 통계에 따르면 한성부의 전체 인구는 18만 9,153명이었고, 용산방이 1만 4,915명으로 전체의 7.8%를 차지했다. 인구 1만 명이 넘는 방은 용산방 외에 반석방(1만 3,882명), 반송방(1만 2,971명) 밖에 없었고, 인구 3천명 이하인 방도 21개나 되었으니 용산방 인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용산방의 영역이 지금의 용산구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지금 마포구의 마포동, 공덕동 일대도 용산방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용산방 동쪽의 한강방과 둔지방이 지금의 용산구가 된다. 그럼 우리 동의 조선 후기 주소를 찾아보자. 찾아서 ‘조선국 한성부 ○부 ○○방 아무개’라고 쓰면 된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으니 값비싼 물건은 보내지 말아야 한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