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횡설수설 ➒

교통의 용산, 그 짧지 않은 내력

용산에 살면서 늘 고맙게 여기는 것은 교통이 편하다는 사실이다.
서울 시내 교통은 물론이지만 용산역과 서울역을 통해 지방을 왕래하기가 매우 편하다.
용산이 교통의 중심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의 일이니, 그 역사가 짧다고 할 수 없다.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용산역

용산 교통의 핵심은 용산역이다. 용산역은 지금도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경원선의 시종착역이지만,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중요한 역이었다. 남북 분단 이전에는 경의선과 경원선이 제대로 운영되었고, 용산역은 이 두 노선의 시종착역이었기 때문이다.
용산역의 탄생
해방 직후의 철도 노선도를 보면 경부선과 경인선, 경의선, 경원선이 모두 용산역에서 만났다. 경원선의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이 갈라졌고, 종점인 원산에서는 함경선이 이어졌으니, 전국을 X자 모양으로 연결하는 간선철도망의 중심에 바로 용산역이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용산과 당인리를 연결하는 용산선이 또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놓인 철도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었다. 경인선은 1897년에 착공되어 1899년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되었고, 한강철교가 완성될 때까지 1년을 기다려 1900년 10월 경성역까지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와 함께 용산역도 영업을 시작했는데, 1900년 7월 8일이 용산역의 영업 개시일, 즉 생일이다. 당시 경인철도 노선도를 보면 한강 북쪽에는 용산역과 남대문역, 경성역이 있었다.
경인선에 이어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경부선은 1901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5년 만인 1905년 1월 1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선과 경부선은 영등포역에서 합류해서 서울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으므로 용산역은 자연히 경인, 경부선 철도가 지나게 되었다. 경부선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인 1904년 3월에는 경의선이 착공되어 1906년 3월 용산-신의주 간 노선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1910년 강제 병탄을 전후해서 경원선 공사가 시작되었고, 1914년 9월에 용산-원산 간 노선이 완공되었다. 경원선에서 가지를 쳐서 원산-회령 구간의 함경선이 1928년에 완공되었고, 청량리-경북 영천 간 중앙선이 1942년에 완공되었다. 이밖에 용산역과 당인리 발전소를 연결하는 용산선이 1929년에 개통되었다.
한국 철도의 메카, 용산역

1907년의 용산역

일제강점기에 용산역은 이렇게 여러 노선이 만나는 환승역이기도 했지만, 그밖에 다른 이유로 철도 교통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에 있는 여러 역 가운데 부지가 가장 넓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는 경의선 건설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철도를 건설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경의선은 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군용철도로 계획되었다. 일본은 용산에서 300만 평을 군용지로 확보하고 헐값에 사들였다(이 이야기는 용산 횡설수설 7, <미군 전에는 일본군이 있었다> 편에 나온다). 그 땅에 군사기지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고 남은 땅 50만 5천 평을 철도용지로 변경했다. 용산에는 역뿐 아니라 전국의 철도를 총괄하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을 비롯해서 철도 학교, 철도 공장, 철도 도서관, 철도 병원, 철도 관사 등 철도 관련 시설들이 모여들었다. 한국 철도의 메카가 된 것이다.
지금도 그때 만든 철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경부선과 전철 경인선은 물론이고 경의중앙선은 그 시절 경의선, 용산선, 경원선, 중앙선을 부분부분 이은 것이다. 이처럼 용산의 교통은 그때부터 발전했다. 그래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를 위해서 해준 일이 아니고, 저들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이란 전쟁 수행과 자원 약탈이었다. 그럼 우리 힘으로는 철도를 만들 수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대한제국은 철도를 놓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일본이 방해하고 철도부설권을 빼앗아 갔다. 경의선을 예로 들어 보자.
경의선은 한반도에서 만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었으므로 일찍부터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가장 먼저 1896년에 프랑스 회사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부설권을 따냈다. 하지만 자본 조달에 실패하고 부설권을 반납했고, 대한제국 정부는 서북철도국을 설치해서 자력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자 일본이 갖은 방법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철도부설권을 가지고 있던 대한철도회사에 차관을 제공하고 그것을 빌미로 경의선 부설 및 운영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가져갔다.
우리 조상들의 희생으로 만든 철도

해방 직후의 철도 노선도

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경의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할 것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정거장 1개 당 평균 10만 평이 넘는 토지를 거의 빼앗다시피 확보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을 동원해서 중노동을 시켰다. 한국인들은 땅을 빼앗기고 거의 강제 노동에 내몰렸다. 공사 현장에서 일본인 감독자에게 맞아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철도 건설에는 일본의 토건업체가 참여했는데, 특히 경의선 건설은 마침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토건업계가 회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정재정, 『일제침략과 한국철도』, 서울대출판부, 1999). 이렇게 만들어진 철도에서 지금 우리는 좌측통행하는 기차를 불편한지도 모른 채 타고 다닌다.
철도에는 100여 년 전 한국인의 희생이 담겼다. 그러니 일본에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철도는 용산을 용산답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가까운 미래에 남북한의 철도가 이어진다면, 그래서 경의선과 경원선이 옛날처럼 운행된다면 그 혜택은 단연 출발역인 용산에 돌아올 것이다. 그 기회를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이 되는 남북 철도 연결에 힘을 보탤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한 가지 더. 서울역도 용산구에 있다. 서울역 일부는 중구에 있지만 서울역사의 대부분과 서울역 도심공항터미널은 용산구 동자동에 있다. 역시 ‘교통의 용산’이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