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횡설수설 ➓

용산의 천주교 유적

2021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지 200년이 되는 해였다. 조금 늦었지만,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되돌아보며 용산구의 천주교 유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용산구에는 김대건 신부와 관련이 있는 유적이 적지 않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할 예정이다.)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새남터 기념성당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당진에서 태어났다. 지금 주소로는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로, 소나무 산이란 뜻의 송산(松山)은 우리말로 ‘솔뫼’가 된다. 당진을 비롯해서 충청도의 예산, 서산, 홍성 일대를 내포(內浦)라고 불렀는데,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에 바깥 세상의 새로운 문물이 물길을 따라 들어오기가 쉬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였다.
한국 천주교의 특별한 역사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을 통해 조선에 소개되었는데, 서양의 학문이란 뜻에서 서학(西學)이라고 했다. 이렇게 처음에는 학문으로 관심을 끌다가 18세기 후반부터 점차 종교의 본래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이승훈, 이벽, 권철신·일신 형제, 정약전·약종·약용 형제처럼 저명한 양반 출신 학자뿐 아니라 일반 상민과 부녀자, 심지어 노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입교해서 신자 수가 19세기 초에 1만 명, 19세기 말에 3만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이 퍼져나가는 한국 천주교의 독특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천주교는 곧 조선의 유교 윤리와 충돌했고 탄압을 받게 되었다. 천주교가 유교식 제사를 거부할 뿐 아니라 양반과 상민·노비의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더욱이 남녀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마다 천주교도들은 목숨으로써 신앙을 증명했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솔뫼에 살던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1784년 무렵 김대건의 큰할아버지 김종현과 할아버지 김택현이 천주교에 입교했고, 이어서 증조할아버지 김진후가 두 아들을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아버지 김제준도 신자였다. 이렇게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대건은 16세 때인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해서 신학을 공부했고, 중국 상하이에서 신품 성사를 받고 신부가 되었으며, 1845년에 귀국해서 선교 활동을 벌이다 이듬해 2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순교할 결심을 할 수 있었나 궁금했는데, 그 집안 내력을 알고 보니 이해가 간다. 증조할아버지 김진후가 1814년에 순교했고, 아버지 김제준도 1839년에 순교한 ‘순교자 집안’이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용산 새남터

김대건 신부 :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문학진 화백이 그린 것이다
출처: [성 김대건 신부(고 문학진 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0. 제공]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장소가 바로 용산 새남터였다. 새남터는 한강 변의 모래사장으로 조선 시대에 군사 훈련장으로 쓰이기도 하고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군문 효수형을 당한 것을 비롯해서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1846년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가,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던 베르뇌 주교 등이 처형을 당해서 네 차례에 걸쳐 총 11명의 성직자와 다수의 일반 신자들이 순교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50년2월에 새남터를 순교 사적지로 지정했고, 1956년에 순교 현양비를 세웠으며, 1987년 한국 전통건축 양식의 기념성당을 완공했다. 다만, 정확한 순교 지점은 확인할 길이 없고, 부지 확보에도 어려움이 있어 순교지로 추정되는 곳 근처에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용산구에는 새남터 말고도 천주교 성지가 또 있다. 신계동에 있는 당고개 성지이다. 여기서는 기해박해가 막바지이던 1839년 12월 27일, 28일 이틀 동안 10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이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이곳은 1986년에 성지로 조성되었다. 지금 서울에는 새남터와 당고개 외에 서소문 밖 네거리와 양화진 옆의 절두산 등 천주교 4대 순교성지가 있는데, 그중 2개가 용산구에 있는 셈이다. 이밖에 용산동 5가에 있는 왜고개 성지도 있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인들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던 장소이며, 김대건 신부의 유해도 잠시 이곳에 모셔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한국천주교 최초의 신학교인 용산신학교가 1887년에 원효로, 지금의 성심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설립되었고, 산천동의 용산교회에는 한국교회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신부를 비롯해서 초기 성직자들의 유해를 모신 성직자묘지가 있으니, 용산구의 천주교 유적 또한 적지 않다고 하겠다.
유서 깊은 용산의 성당들

삼각지성당 전경 : 작지만 73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성당이다

용산구에는 또 유서 깊은 천주교회, 즉 성당이 여럿 있다. 역사가 70년이 넘는 것만 해도 산천동에 있는 용산성당, 한강로 1가의 삼각지성당, 그리고 후암동성당 등 세 개나 된다. 이 셋은 모두 중림동에 있는 약현성당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약현성당은 1891년 종현성당(지금의 명동대성당)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이후 1941년에 용산성당, 1948년에 삼각지성당(처음 이름은 신용산성당), 1949년에 후암동성당(처음 이름은 동자동성당)이 차례로 약현성당에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 세 성당 말고도 용산구에는 용산동 2가의 해방촌성당(1954년), 이태원성당(1960년), 청파동성당(1963년), 이촌동의 한강성당(1970년), 새남터성당(1981년), 한남동성당(1997년) 등이 있고, 이밖에 외국인 사목을 위한 외국인 국제성당(1970년)과 국군 사목을 위한 국군중앙주교좌 성당(1983년)이 용산구에 있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뒤 유해는 안성 미리내로 옮겨졌다가 1901년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어 6.25 전쟁으로 밀양으로 피난할 때까지 50년 동안 용산에 머물렀다. 지금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여러 곳에 모셔져 있는데, 새남터 성지도 그중 하나이다. 또 김대건 신부가 일곱 살 때 고향인 솔뫼를 떠나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던 중간에 잠깐 서울 청파에서 산 적이 있다고 하니(한국교회사연구소, 「김대건 신부 연보」『교회사연구』12, 1997) 이래저래 용산은 김대건 신부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