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횡설수설 11

용산에서 보물찾기

용산에 보물이 많다는 이야기는 전에 한 적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리움미술관이 용산구에 있어서이다. 하지만 이번 달에는 박물관 밖에서 보물찾기를 해보려고 한다. 뜻밖의 장소에 있는 <연복사탑 중창비>가 그 주인공이다.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교수)
한강로3가 40-1010번지에 있는 연복사탑중창비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한강로3가 40-1010번지, 철도회관 앞 조그만 정원에 <연복사탑 중창비>가 있다. 이름 그대로 연복사라는 절에 탑이 있었는데, 그 탑이 무너진 것을 새로 만들었고(중창), 그러면서 함께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연복사 탑을 새로 만들게 된 경위가 쓰여 있었을 것인데, 그 내용이 새겨져 있던 몸돌은 없어지고 몸돌을 받치고 있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귀부)과 몸돌 위에 올려져 있던 지붕돌(이수)만 남아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비석은 정작 중요한 몸돌은 없어지고 부속물만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이 유물을 찾아 나서는 걸까?
고려의 대표적인 절, 연복사

<연복사탑 중창비>의 가치를 알려면 먼저 연복사라는 절에 대해 알아야 한다. 연복사는 고려시대에 수도였던 개경(지금은 개성)에 있던 절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고려는 불교 국가였다. 국왕부터 시작해서 전 국민이 불교 신자였고, 승려의 수도 굉장히 많았다. 아들 셋이 있으면 그중 하나는 출가할 정도였다. 절도 굉장히 많았다. 조선 초에 권근은 개경에 절이 민가보다 더 많았다고 했다. 그 수많은 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복사였다고 하면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복사는 개경 한복판에 있었다. 태조 왕건이 개경에 지은 10대 사찰 가운데 하나였고, 전국의 3대 선종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건물은 1천 칸이 넘었으며, 중심 전각인 정전은 궁궐보다 더 화려했다고 전한다. 특히 이 절에는 세 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 그리고 5층 목탑이 있기로 유명했는데, 5층 목탑은 높이가 200척(60m)이 넘는 거대한 크기였다. 신라의 경주에 황룡사 9층탑이 있었다면 고려 개경에는 연복사 5층탑이 있었던 셈이다. 아마 당시에는 개경 어디서도 이 탑이 보였을 테니, 랜드마크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언젠가 연복사도 파괴되고 탑은 불타 없어졌다. 아마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 있던 사이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고려 말이 되면 국왕들이 연복사를 수리하고 탑도 다시 만들고 싶어 했다.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국왕의 권위가 추락한 뒤였다. 1356년에 공민왕이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역대 국왕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태조를 소환했다. 태조의 정치를 부활하겠다고 선언하고, 태조가 세웠던 연복사 탑을 다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았다.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뒤에도 홍건적에, 왜구에, 게다가 고려에서 쫓겨난 원나라까지 고려를 침략해와 이 큰 탑을 다시 만들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양촌집》의 ‘연복사탑 중창기’. 이 글이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연복사탑 중창의 정치학

공민왕이 신하들에게 시해당하면서 왕실의 권위는 더 추락했다. 그 뒤를 우왕과 창왕이 계승했지만, 신돈의 후손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국왕으로서 권위를 갖기 어려웠다. 결국 이성계가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창왕을 쫓아내고 왕족인 공양왕을 세웠다. 그리고는 허수아비 왕이 되기를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공양왕이 제대로 왕 노릇을 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연복사 탑을 중창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조의 권위를 빌어와 왕권을 강화하고 이성계와 대결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이성계 일파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대부분 성리학자였던 이들은 상소를 올려 불교는 이단이며,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양왕이 불교에 심취해서 연복사 탑을 중창하는 것을 비난하고 불교를 믿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또 현실적으로는 대규모 토목 공사가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을 위협할 것이라며 중지를 요구했다. 결국 공양왕은 신하들에게 굴복해서 연복사 탑 중창을 중지하라는 왕명을 내렸고, 국왕의 권위는 또 한 번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기막힌 반전이 일어났다. 왕명이 있고 한 달도 못 되어 이성계가 연복사 탑 중창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가 불심을 앞세워 이런 요청을 했을 때, 공양왕에게 그렇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사가 시작된 지 1년 반만인 1392년 12월에 탑이 완성되었고, 그 사이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어 있었다. 탑이 완성되었을 때 여러 가지 경축 행사가 벌어졌는데,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무학대사였다. 그리고 당대의 문장가 권근이 왕명을 받아 탑의 중창을 기념하는 글을 지었고, 당대의 명필 성석린이 글씨를 썼으며, 이것을 돌에 새겨 이 <연복사탑 중창비>를 세웠다. 지금 비석은 없어졌지만, 비문의 내용은 권근의 문집인《양촌집》에 남아 있다. 한문 약 1천 글자의 장문이다.

연복사탑 중창비의 이수
교룡(蛟龍)이 둘러싸고 있는 제액(題額)에 ‘연복사탑중창지기(演福寺塔重創之記)’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용산의 보물, 연복사탑중창비

조선시대에 연복사 탑은 개성 여행의 명소였다. 5층까지 올라가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조선시대에 전국에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건물이 이것이 아니었다 싶다. 실제로 성종 때 남효온이 개성 여행을 가서 이 탑 위에 올라갔다는 얘기를 기행문에 남겨 놓았다. 하지만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에서 연복사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절은 임진왜란 때 폐허로 변했고, 탑은 그 이전에 이미 소실되었다. 연복사에 있던 유물 가운데 남은 것은 범종과 중창비가 유일하다. 범종은 지금 개성의 남대문에 있지만, 중창비는 부서진 채 용산에 와 있다.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1910년에 <연복사탑 중창비>는 이미 용산역 근처로 옮겨져 있었고, 그때도 몸돌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었다. 개성과 용산을 잇는 것이 바로 경의선 철도이니, 아마 1904년 경의선 공사가 시작된 뒤 언젠가 기차에 실려 옮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옮겨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제가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용산역까지 옮긴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없다. 비석의 몸돌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혹은 어딘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만으로 보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만든 연대가 1394년으로 확실하고,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과,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권근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용산이 품고 있는 귀한 보물이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