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횡설수설 16

교통의 용산, 청파역과 이태원

2020년 ‘이태원 클라쓰’라는 TV 드라마가 있었다. 포차로 성공한 젊은이의 통쾌한 복수극인데,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이태원에서 바라본 남산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이태원에서 바라 본 남산 전경

이태원은 지금 서울 최고의 핫플레이스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카페, 맛집, 공연장, 클럽이 모여 있고,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태원의 경리단길은 요즘 전국의 소위 ‘뜨는’ 동네에 붙는 “○리단길”의 원조다. 서울에는 망원동의 망리단길, 송파구의 송리단길, 공릉동의 공리단길, 신용산의 용리단길이 있고, 지방에도 경주에 황리단길, 대구와 김해에 봉리단길, 전주에 객리단길 등등이 있다. 젊은이들이 모여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다. 그런데 이태원은 본래 무엇을 하던 곳일까?

보제원, 홍제원, 전관원 그리고 이태원

이태원의 원(院)은 숙박 시설, 지금으로 치면 여관이나 호텔을 의미했다. 공무로 지방을 오가는 사람들이 숙박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운영한 국립 여관으로,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무려 1,310개의 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양 근처에는 4개가 있었는데, 흥인문(동대문) 밖의 보제원, 돈의문(서대문) 밖의 홍제원, 광희문(남소문) 밖의 전관원, 그리고 숭례문(남대문) 밖의 이태원이 그것이다. 지방에 있던 원 가운데는 장호원, 조치원, 사리원 등이 지금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이태원은 지금 이태원과는 거리가 좀 떨어진 용산동에 있었고, 지금 용산고등학교 정문 앞에 ‘이태원지(梨泰院址)’라는 표석이 있다. 그런데 이 표석에는 “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근교 네 숙소(四院)의 한 곳”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는데,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었는지는 확인해 볼 일이다.

이태원의 명칭과 관련해서 『동국여지비고』라는 책에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진왜란 뒤에 귀순한 왜인들을 숭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하여 자연히 마을을 이룬 까닭에 그 마을 이름을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부르다가 뒤에 이태원으로 고쳤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지만, 임진왜란 이전에도 이태원이 있었으므로 이 기록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태원이란 명칭은 고려시대에는 없었고, 조선 초 『세종실록』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이 마을 운종사(雲鐘寺)에 머물면서 여승들을 겁탈해서 잉태하게 했으므로 하여 그 절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속되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이 또한 근거 없는 당시의 유언비어일 뿐이다.

이태원지 표석

고려시대 남경의 청파역

이태원은 조선 건국 후 전국의 교통망을 재정비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여관과 호텔은 교통이 편리한 곳에 지어지기 마련이다. 용산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시대 용산의 교통을 대표하는 것은 용산구 청파동의 뿌리가 되는 청파역이었다. 역이란, 지금은 철도나 지하철에서 기차가 출발하거나 정차하는 곳을 가리키지만, 옛날에는 말을 갈아타는 곳이었다. 공무로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국가 기관으로 설치되었는데, 그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시대에 전국으로 확대되고 조선시대에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때 우체국의 전신인 우체사가 설치되면서 없어졌다. 교통기관이던 역이 근대 들어 우편, 즉 통신 기관으로 계승된 점이 흥미롭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교통망이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전국에 모두 22개의 도로망이 개설되어 개경에서 전국 각지로 통할 수 있었고, 도로 곳곳에 총 525개의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로가 수도 개경에서 제2대 도시인 남경(지금의 서울)에 이르는 길이었다. 당시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도로망을 청교도(靑郊道)라고 불렀는데, 청교도는 다른 도로망과 달리 두 개의 길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개경의 청교역에서 동쪽으로 가서 장단나루에서 임진강을 건넌 뒤 파주와 의정부를 거쳐 노원역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의 이름을 장단나룻길이라고 했다. 이 길을 타고 계속 내려가면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광주로 갈 수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는 이 길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장단나룻길과 임진나룻길

개경과 남경을 잇는 또 하나의 길은 개경의 청교역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 파주에서 임진강 하류의 임진나루를 건넌 뒤 고양시와 은평구를 거쳐 청파역으로 이어졌다. 이 길은 임진나룻길이라고 했다. 고려 중기 문종 때 남경이 설치되고 그때부터 북악산 아래가 남경의 중심이 되면서 장단나룻길 대신 임진나룻길이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에 따라서 임진나룻길의 종점인 청파역이 중요해졌다. 임진나룻길로 청파역까지 내려오면 용산구 한남동의 한강변에 있던 사평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넜다. 사평나루는 광나루에 비해 한강 하류에 위치했으므로 강폭이 넓었지만 임진나룻길이 활성화되면서 한강을 건널 때 주로 사용되었다. 사평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양재역까지 가면 거기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 길과 충청도로 가는 길이 갈라져 전국으로 이어졌다. 고려시대에도 숙박 시설인 원이 있었는데, 남경 남쪽에는 이태원 대신 사평나루 건너 한강 남쪽의 광주에 사평원이 있었다.

장단나룻길과 임진나룻길(정요근, 「교통의 발달과 남경」 『서울 2천년사』 9, 2014

조선 건국 후에는 전국의 도로망이 한양을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한양에서 전국 주요 지점에 이르는 간선도로망에는 30리마다 역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한양 남쪽의 교통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갈 때는 사평나루, 즉 한강진에서 한강을 건너 양재역으로 가는 길이 주로 이용되었는데, 도성 남쪽의 첫 번째 역으로서 한강진을 연결하는 청파역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청파역은 흥인문 밖의 노원역과 더불어 특별히 중시되어 병조에서 직접 관할했다. 지금은 청파역이나 이태원이 옛 이름과 상관없이 발달하고 있지만, 그 전통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교통의 용산’이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사족. 경리단길은 본래 육군의 재정을 관리하던 중앙경리단이 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지금 경리단은 이름이 바뀌었고 경리단길만 남았다. 몰라도 되는 사실이지만, 언제까지 알아야 하는 것만 알고 살텐가.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