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횡설수설 12

1984년, 용산의 국제빌딩

노량진에서 142번 버스를 타면, 한강대교를 건너 용산우체국 앞을 지나 서울역, 신촌을 거쳐 모래내, 수색까지 갔다.
용산역은 찻길에서 한 블록 뒤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고 용산의 랜드마크는 지금도 남아 있는 우체국이었다.
그러다가 용산에 어마어마한 건물이 들어섰다. 1984년 이야기다.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용산의 그 어마어마한 건물이 지금의 LS용산타워이다. 그때 이름은 국제센터빌딩이지만, 흔히 국제빌딩이라고 불렀다. 지금이야 주변에 있는 더 큰 건물들 때문에 존재감이 살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용산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손색이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고층 건물의 대명사였던 삼일빌딩이 지상 31층, 높이 110m였으니, 지상 28층 높이의 국제빌딩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큰 건물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또 가까이에 있는 고층 건물이 서울역 앞의 대우빌딩이나 여의도에 있는 63빌딩 정도였으니, 용산 일대에서는 국제빌딩이 유아독존하던 시절이 있었다.
게다가 국제빌딩은 네모반듯하지 않아서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신기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을 당시부터 장안의 화제였고, ‘천의 얼굴’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마침내 1984년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누가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정되기도 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어마어마한 건물의 시작이 고무신이었다는 점이다. 국제빌딩의 주인인 국제상사가 해방 직후에 설립된 고무신 공장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무신과 국제상사

1960년대, 1970년대 초까지는 고무신이 시골, 가난의 상징이었다. 특히 검정 고무신이 더 그랬다. 도시에서는 좀 사는 집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거나 하다못해 흰 고무신을 신었다. 여자애들은 꽃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색동 무늬가 있는 코빼기 고무신을 신기도 했다. 왕자표, 말표, 범표, 기차표, 타이어표 등 고무신 상표가 여럿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중 왕자표 고무신이 국제빌딩의 씨앗이 된다.

고무신은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운동화나 구두에 밀려 점점 사라지게 되지만, 그전까지는 최첨단 신소재 제품이었고, 또 나름의 화려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고무신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에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행사의 정식 명칭은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였다. ‘시정(施政)’이란 좋은 정치를 베푼다는 뜻이지만,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해서 한국인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고는 오히려 한국인에게 무언가를 베풀었다고 뒤집어 말한 것이다. 그 5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서 그동안 자기들이 한국을 얼마나 발전시켰는지 홍보하기 위한 행사를 열었다. 장소를 경복궁으로 택한 것은 500년 동안 왕실의 성스러운 공간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궁궐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해서 조선 왕실이 별것 아님을 알리려는 의도에서였다. 속없는 사람들은 궁궐 구경에, 주변의 명월관·태화관 같은 요릿집 탐방까지 겸해서 서울 나들이를 했고, 돈과 시간 여유가 있으면 나선 김에 금강산 관광까지 패키지여행을 했다. (이 이야기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아무튼 그 조선물산공진회의 최고 히트상품이 고무신이었다.

신발이라야 짚신이 고작이던 시절에 고무신은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가볍고, 비가 와도 새지 않으며, 닳도록 신을 수 있어 마치 평생 신을 것만 같은 이 신발을 당시 한국인들은 근대 문명의 선물로 여겼다. 그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상상하기 어렵지만 순종 황제도 고무신을 신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고무 산업이 발달하고 고무신 공장도 많아졌다. 공장이 너무 많아져 과잉 생산이 우려되자 조선총독부에서 강제로 정리할 정도였다. 1934년 부산의 산와고무는 연간 천만 켤레의 고무신 생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만큼 고무신을 많이 만들고 많이 신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8년 부산에서 양정모가 아버지 양태진의 정미소 한켠에 국제고무공업사를 세우면서 국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공장은 1949년에 국제화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듬해에 일어난 한국 전쟁으로 특수를 누리면서 크게 성장했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 신발 생산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신발 회사였다. 내가 기억하기에 이 회사의 대표 상품은 프로스펙스 운동화다. 신을 것이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고속 성장을 한 끝에 1980년대에 미국에서 나이키라는,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비싼 운동화가 들어왔을 때, 그것과 경쟁한 국산 브랜드가 (NIKE를 과감하게 모방한 NICE 운동화 말고는) 프로스펙스가 유일했다.

국제빌딩의 빛과 그림자

신발 산업에서 대성공을 거둔 뒤에는 회사 이름도 국제상사로 바꾸고 산업을 확장해서 재벌의 꿈을 키웠다. 그 결과 1980년대에 들어오면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의 재벌, 국제그룹으로 성장했다. 그 전성기를 보여주는 것이 1984년 10월에 완공된 이 국제빌딩이다. 그런데 국제그룹의 전성기는 한순간에 저물었다. 1985년 2월 부실기업으로 지목되어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무리한 기업 확장과 해외 공사의 부실 때문이라고 했지만,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눈 밖에 난 것이 진짜 이유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실시된 제12대 총선 당시 국제그룹의 ‘협조’가 부족했다거나, 전두환이 부산을 방문했을 때 양정모 회장이 마침 미국에 가 있어 만나지 못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거나, 전두환이 주최한 만찬에 양정모 회장이 늦게 참석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그럴듯한 이야기가 덧붙었지만, 어느 것도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나는 이것이 헛소문이길 바란다. 이 거대한 재벌이 대통령 눈밖에 나서 해체되었다고 한다면 1980년대에 민주주의 국가에 살았다는 내 믿음이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는 전두환 정부가 국제그룹 해체를 지시한 것이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위헌이라고 판정했다. 떠도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었다.

국제그룹은 해체되었지만, 국제빌딩은 남았다. 건물 주인은 한일그룹에서 이랜드를 거쳐 2006년부터는 LS그룹 소유가 되었다. 이름도 LS용산타워로 바뀌고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그 사이에 주변에 더 높은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과거의 영예를 되찾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그 건물 가운데 국제빌딩만큼 오랜 역사와 스토리를 갖는 건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 잘 알려진 역사 전문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서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