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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화석’

은행나무의 수난

우리에게 익숙한 가로수이자 공룡 시대부터 존재해 온 은행나무가 최근 악취로 인한 가로수 교체 논란 중심에 섰다. 야생에서는 멸종위기에 처했지만 인류와의 특별한 인연 덕분에 생존을 이어온 은행나무의 진화적 역설과 악취의 원인, 그리고 지속 가능한 상생 방안을 살펴본다.

글. 고호관 작가

멸종위기종 은행나무의 진화적 비밀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로수다. 길가에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는 풍경은 한국사람이라면 흔히 보아 온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은행나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열매 때문이다. 열매에서 풍기는 특유의 악취는 지나가는 사람의 코를 찡그리게 한다. 땅에 떨어진 뒤 사람들 발에 밟혀 터지면 냄새는 더욱 고약해지고 보도블록도 얼룩덜룩해져 보기 좋지 않다.
불평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서울시는 길가의 은행나무를 다른 나무로 교체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서울환경연합이 올해 서울시에서 사라지는 은행나무가 800그루에 가까울 것이라고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오랫동안 뿌리 내리고 자라 온 나무를 고작 냄새 때문에 교체하는 게 옳은 일이냐고 지적하고 있다.
은행나무 열매에서 구린내가 나는 건 ‘빌로볼’과 ‘은행산’, ‘부탄산’과 같은 성분 때문이다.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동물이 씨앗을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많은 식물은 동물을 이용해 씨앗을 퍼뜨리는데 은행나무는 왜 악취가 나서 동물이 먹기 싫어하는 열매를 맺도록 진화했을까? 동물이 아니면 씨앗을 어떻게 퍼뜨리고 있을까? 이런 의문은 매우 합당하다. 실제로 은행나무는 멸종위기종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의외로 들리지만, 야생 은행나무는 극소수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은행나무의 대부분은 사람이 심어서 가꾸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공룡이 활보하던 약 2억 년 전부터 존재해 온 ‘살아있는 화석’이다. 아마도 오랜 과거에는 은행나무 열매를 먹어서 씨앗을 퍼뜨려주던 동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동물이 멸종한 뒤 은행나무는 서서히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DNA 분석 기술로 여는 쾌적한 상생의 길

은행나무가 멸종위기에 처했을 때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사람이었다. 덕분에 은행나무는 동물의 소화기관을 이용하지 않은 채 멸종위기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은행나무는 목재의 결이 고르고 아름다워 가구 재료로 쓰인다. 열매는 먹기도 하며, 약으로도 쓰였다. 지금도 은행잎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혈액 순환 개선제가 쓰이고 있다.
가로수로 널리 쓰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은행나무는 공기 정화 능력과 병충해 저항성이 뛰어나며, 수명이 길고 생명력이 강하다. 또 수분 함량이 많아 불에 잘 타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치 역시 한몫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만드는 가을 풍경은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다.
문제는 냄새다. 다행히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있다. 나무 중에서 드물게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존재한다. 수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으므로 가로수로 수나무를 심으면 악취 문제에서 해방된다. 과거에는 암나무와 수나무를 구분하기 어려워 암수 구분 없이 심었지만, 이제는 DNA 분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논란을 해결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수나무만 골라 심고 기존의 암나무도 차차 수나무로 교체하면 우리는 쾌적하게 은행나무가 만드는 길거리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